요한 1서 3:1~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
요한 1서 3:1~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말씀 묵상을 돕는 글】
요한 1서 3장 1절을 보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떠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허비하고, 쏟아버리는(lavish)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자녀’(τέκνα)라고 할 때 사도 바울은 법적인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υίός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요한은 법적인 면보다는 실질적인 면, 내용적인 면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τέκνα’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호적상으로 자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러므로’가 나오는데, 뒤에 연결되는 내용을 생각하면 조금 어색한 표현입니다. 오히려 ‘그러므로’ 보다는 ‘그렇지만, 그런데도’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엄청난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삼아 주셨는데,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모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 보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지는 사람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κόσμος(세상이) ού(부정 부사, 결코 아니다, no) ϒινώσκει(안다) ημας(우리를)입니다. 말 그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는 뜻인데, ‘안다’는 단어가 ‘체험적 지식’을 의미하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에 대해 체험적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도 바른 지식, 체험적 지식이 없고, 오히려 잘못된 지식만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 지식에 갇혀서 ‘왜곡된 지식,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당시 교회 안에서 잘못된 가르침을 전했던 거짓 교사들이 이렇게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들을 향해, 2장 22절에,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잘못된 지식을 갖게 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인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수의 아들로 30년동안 별볼일없는 삶을 살았던 예수의 생애가 신성을 훼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영)가 예수에게 임했다가, 예수님께서 죽기 직전에 그리스도(영)께서 떠나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케린투스(Cerinthu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사를 보면 폴리캅의 이야기 중에, 사도 요한이 에베소의 공중목욕탕에서 있다가 케린투스가 목욕탕에 들어오는 것을 보자 사도 요한이 벌떡 일어나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왜냐하면 케린투스와 함께 있다가 자칫 그에게 떨어질 심판이 자기에게도 떨어질까 두려워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설같은 이야기이지만 요한이 에베소에 있을 당시 케린투스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래서 요한은 이와같은 사람들의 잘못된 가르침, 잘못된 신학, 잘못된 영향을 경계하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하고, 신성만 취하려는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사건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제대로 모르는 것은 그들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우리들에게도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2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아직 완성된 모습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천국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천국의 삶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이게 ‘아직’과 ‘이미’라는 종말론적 긴장 관계인데, 사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불완전하고 부족한 상태, 예수님을 믿고 거룩한 삶을 살고 싶지만 한편으로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약함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하는데, 아직 장래의 모습이 완전히 나타나지 않은 불완전한 사람임을 인식하면서 억지로 꾸미거나 포장하지 말고 정직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다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절을 보면,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현재의 모습은 불완전하고, 연약하지만 거기에서 포기하거나 만족하지 않고 주를 향한 소망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삶’을 바라면서 살아야 하는데, ‘깨끗하다’는 말은 ‘의롭다’는 단어와 거의 같은 의미입니다. 또한 ‘의롭다’는 말도 ‘완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그대로 보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깨끗한 사람’, ‘의로운 사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아직’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그 때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1.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2. 아직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깨닫고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게 하소서.
3. 주를 향한 소망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