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3:7~9,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3:7~9,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 묵상을 돕는 글】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에서 게으른 사람들, 가르침을 받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떠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과 교제를 지속하게 되면 잘못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정반대로 ‘본받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7절을 보면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스스로 안다’는 말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이미 바울을 통해 필요한 지식을 들어서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은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에 관한 것인데, 문자적으로는 ‘우리를 본받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의미합니다. 결국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바울을 본받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본을 보여준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바울은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바로 앞에 6절에서 ‘게으르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라고 말했던 것과 정반대되는 모습인데, ‘무질서’라는 것은 특히 ‘무절제, 무책임, 불복종’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대열에서 이탈해서 제멋대로 살아가면서 무절제하고, 무책임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과 달리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전혀 다르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이와같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귀 기울여서 들어야 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경쟁적으로 소비를 부추기는 세상의 풍조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건과 절제, 검소함과 소박함을 지켜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바울은 이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와같은 경건의 절제의 삶의 본을 보여주었고,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이와같은 바울의 삶을 익히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8절에 나오는데,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하였다고 말합니다.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았다’는 것은 단지 밥값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값없이’는 ‘선물로, 선물하는 방식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물을 줄 때는 ‘값없이’ 주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을 한 것입니다. 비슷한 예가 마태복음 10장 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천막을 짓는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했던 이유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사실 마태복음 10장 9절과 1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면서 돈을 받지 말아야 하지만 생계를 위해 필요한 것은 사람들로부터 공급받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도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9절을 보면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권리’는 ‘권위’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교회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9절을 보면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어떤 경우에는 교회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종말 사상에 빠져서 게으르고 무질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주려고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핵심은 바울이 일을 하면서 사역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신학에 빠져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일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잘못된 신학에 빠져서 일만하고 있었다면 바울은 기꺼이 ‘안식과 쉼’의 본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어떤 행동을 하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행동을 하게 된 이유와 동기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1. 무질서하고, 무절제 한 삶을 살지 않게 하소서.
2. 게으르게 행하면서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3. 바울이 보여주었던 본을 따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