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1:1~3,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야고보서 1:1~3,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말씀 묵상을 돕는 글】
오늘부터 야고보서 말씀을 묵상합니다. 야고보서는 베드로 전/후서, 유다서, 그리고 요한 1, 2, 3서와 함께 공동서신이라고 불려집니다. 이 편지들은 특정한 교회나 개인이 아니라 교회 일반에게 보내진 편지들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데, 먼저 야고보서 1장 1절을 보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고 말합니다. 야고보가 이 글을 쓰는 대상을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1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유대인들의 지파 구분은 초대 교회 시대 이전에는 이미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2장 2절을 보면 ‘회당’이라는 표현이나 5장 7절에서 ‘이른 비와 늦은 비’, 5장 12절에 나오는 ‘맹세하지 말라’라는 표현들이 모두 유대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야고보서가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를 기록한 저자가 누구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이 최소한 5명 이상이 등장합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행전 15장 1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동생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주의 형제 야고보, 젊은 야고보, 사도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어쨌든 야고보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같은 위격으로 놓는 것은 초대 교회 당시에는 흔히 사용되던 표현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로마서 1장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말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같은 위격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절이나 디도서 1장 1절, 베드로후서 1장 1절, 유다서 1장 1절, 요한계시록 1장 1절에도 비슷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위격을 강조하게 된 이유는 당시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에비온파’(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았지만 예수님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고, 유대인의 율법과 의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와 같은 이단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고보서의 또다른 특징은 편지의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상 편지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인데, 1장 1절을 제외하면 사실상 편지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마지막에도 편지의 형식으로 끝나지 않고 내용 중에도 수신자의 형편을 암시하거나 구체적인 응답을 주는 내용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야고보서를 편지가 아니라 윤리적인 교훈집을 편지의 형태로 제시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특히 야고보서의 전체 108구절 중 54개의 동사가 이인칭 명령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윤리적인 권고를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야고보서에는 기독교적인 복음의 선포보다는 윤리적인 내용들이 주요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복음적 설교라고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야고보서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딱 두 번(1장 1절, 2장 1절) 밖에 나오지 않는데, 이 구절들을 삭제해도 내용 흐름상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야고보서가 처음에는 비기독교적인 문서였는데 나중에 기독교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런 특징 때문에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로마서와 비교해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와같은 평가는 야고보서의 가치와 중요성을 간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야고보서에는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 구약의 잠언 전승, 그리고 헬라의 교훈 전승들로부터 많은 유익한 교훈의 말씀들을 수집하여 기독교인의 생활을 지도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야고보서에 나오는 내용과 산상수훈의 말씀이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래서 야고보서는 서신의 성격보다는 오히려 유대교의 지혜 문학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고, 실제로 구약의 잠언서에 필적하는 신약의 잠언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학자들마다 여러 의견을 제시하고 있지만 야고보서는 AD 50년경의 팔레스틴의 유대인 그리스도인 교회의 형편과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교회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아직 예수님의 말씀이 글보다는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을 때였는데, 이렇게 예수님의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많이 생존해 있었고 그 중에서도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주의 형제였던 야고보’ 자신이었기 때문에 야고보가 야고보서에서 굳이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언급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이유로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보다는 오히려 성도들의 삶과 행위에 집중해서 말하려고 하였고, 당시에는 아직 사도 바울이 이방인 지역으로 가서 선교를 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방인 선교와 관련된 문제나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헬라인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주제들은 아직 야고보서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에 나오는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2절을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형제들’은 유대인들이 같은 동족에게 주로 사용했던 표현이었지만 초대 교회에서는 교인들 상호간에 불렀던 호칭으로 친근하고 따뜻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가장 첫머리에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험’(πειρασμοῖς)은 ‘Temptation, trial, testing’등의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히 외부적인 이유로 주어지는 ‘trial’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때 당시 성도들에게 최대 관심사는 ‘시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지고 고난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시험을 당하더라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모든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어떤 종류든지 ‘시험’에 직면할 수 밖에 없지만 그와같은 시험을 통해 성숙한 인격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회피하는 것보다는 마땅히 받는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험을 회피하기 보다는 시험을 이겨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다. 또한 여기서 ‘여러가지’ 시험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시험의 종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겪는 시험의 종류와 성격과 강도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해결책을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만 야고보가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시험을 만나는 것은 괴로운 일만이 아니라 오히려 ‘기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3절을 보면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성도들이 ‘시험’을 ‘믿음의 시련’이라고 받아들이면 궁극적으로 성령의 열매는 과정, 즉 ‘인내’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의 삶을 살면서 혹시 감당하기 버거운 시험 때문에 속상하고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너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시험을 하나님께서 인내와 성숙의 계기로 허락하여 주셨음을 믿고 담대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1.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 시험을 당하더라도 온전히 기뻐하게 하소서.
3. 믿음의 시련을 통해 인내를 배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