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서 1:1~4, 우리의 사귐

 

요한11:1~4, 우리의 사귐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 묵상을 돕는 글

 

요한1서는 발신자와 수신자도 없고, 끝에 인사나 축복의 말도 없습니다. 그래서 편지라고는 하지만 편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한1서를 편지가 아니라 일종의 소책자 혹은 설교로 보기도 하는데, 어쨌든 요한1서를 읽어보면 요한복음과 많이 닮았다는 금방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용하는 단어들이 비슷하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1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라고 말하는데, 요한복음 11절에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말하고, 2절에는 생명, 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도 요한복음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또한 요한1서가 기록된 배경도 요한복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가 이방 세계로 진출하면서 이방인들의 세계관, 인생관, 사고 방식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기독교의 진리가 왜곡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생겨났는데,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세례받을 때 그리스도()가 예수에게 임했다가 죽기 직전에 떠나갔다고 주장하는 케린투스(Cerinthus)의 영지주의적 헬라 사상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영이고, 단지 사람처럼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가현설(docetism)이 유행하면서 성도들의 신앙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절을 보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생명의 말씀’(2절에서는 영원한 생명’)예수 그리스도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생명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듣고, 손으로 만졌다고 말하는 이유는 가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현적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분으로 사도들과 함께 동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없는 우리들에게는 이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2절을 보면,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사도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사도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였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귐(코이노니아) 흔히 교제라고 번역되는 단어인데, 일반적으로 교제를 예배 후에 친교를 하거나 함께 밥을 먹고, 즐거운 주제로 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교제, 코이노니아성령 안에서의 교제’, ‘성령이 상호 교통하시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교제를 통하여 를 연결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사귐의 관계에 있고,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사귐의 관계에 갖게 되니까 사도들은 예수님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도 사귐의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고, 예수님과 사귐의 관계에 있던 사도들이 다른 사람들과 사귐의 관계가 되니까 이 사람들도 예수님과 사귐의 관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 끝에 우리의 사귐이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직접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손을 잡을 수 없지만 신앙인들이 서로 맞잡는 사귐을 통해 그 손길이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사도들까지 이르게 되고, 그 손은 마침내 하나님과 손을 잡고 있는 예수님의 손과 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귐의 신비로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존재론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은 존재론적인 방식보다는 인식론적인 방식으로, 사귐의 관계 속에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사귐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으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귐,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귐,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사귐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와같은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축복이 있는데, 4절을 보면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사귐의 결과가 충만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성 프란체스코에 관한 이야기 중에 하루는 성 프란체스코가 움브리안 숲을 거닐며 오 하나님, 당신은 누구시며 나는 누구입니까?’ 이렇게 질문하며 기도하다가 그만 숲에서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숲 속에서 이틀 동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맸는데, 이틀이 지나자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오 하나님, 제발 먹을 것 좀 주십시오. 저는 지금 배가 고픕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자마자 집 한 채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 집 바로 옆에는 등불이 걸려 있었고 큰 표지판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날마다 신선한 빵을 구워내고 있습니다라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허기진 성 프란체스코는 그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리면서 부탁을 하였습니다. ‘부인,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집에서 날마다 굽고 있는 신선한 빵 한 조각만 주십시오그러자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해요, 신부님! 우리 집에는 갓 구워낸 빵은 없습니다. 우린 그저 이런 표지판을 만들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신선한 빵은 없으면서도 표지판만 신선한 빵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주님과의 진실한 사귐과 만남으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1. 생명의 말씀을 만지게 하소서.

2. 생명의 말씀과 사귐이 있게 하소서.

3. 주님과의 사귐을 통해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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