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17~19,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전서 1:17~19,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말씀 묵상을 돕는 글】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인생 여정은 ‘거룩’을 향한 여정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거룩함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거룩’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17절을 보면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말합니다. ‘외모를 보지 않는다’(ἀπροσωπολήμπτως)는 말은 ‘편견을 갖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특히 어떤 사람의 인종, 민족, 혈통에 대한 선입견을 갖지 않는 것인데, 그래서 하나님께 외모로 보지 않는다는 말은 그 사람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유리하다거나 혹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불리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편견이나 불공평하지 않고 그 사람의 행위와 잘잘못에 따라 판단하는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고, 성도들도 그렇게 부른다고 말하는데, 사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9절이나 누가복음 11장 2절에서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6장 32절을 보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쨌든 인간을 외모를 보지 않고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성도들이라면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그네’라는 것은 본향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인데, 어떤 사람이 고향에서 살고 있다면 혹시라도 실수와 잘못을 범해도 가족이나 친척, 친구가 그 사람의 ‘외모와 관계’를 보고 너그러이 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타향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행동’으로만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고향에 있을 때처럼 안일하게 살지 말고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18절을 보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εἰδότες)라는 표현은 신앙에서 가장 기초적인 내용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관용구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말하려는 것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도 익숙하게 알려진 표준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이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은 유대인의 생활 양식보다는 이방인의 생활 양식을 나타내는데, 왜냐하면 ‘헛된(ματαίας) 행실’이라는 단어는 ‘worthless, empty, vain’이라는 뜻인데, 일반적으로 우상 숭배나 거짓된 가르침을 나타내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속함을 받았다’(ἐλυτρώθητε)는 것은 ‘price of release’(돈을 받고 지불하거나 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대속을 위해 지불한 값은 당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금이나 은’과 같은 것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소중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값없이’ 구속함을 받았다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값없이’라는 말은 우리가 거기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래서 ‘값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값을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가치와 기준으로는 도저히 값을 매길 수 없기 때문에 ‘값없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금이나 은과 비교할 수 없는 ‘값’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19절을 보면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흠이 없다’(ἀμώμου)는 말은 부정접두어 ‘α’와 결점, 잘못을 의미하는 ‘μῶμος’의 합성어인데, 구약 성경에 나오는 ‘תָּמִים’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흠이 없는’ 제물을 드린다고 할 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그리고 ‘점이 없다’(ἀσπίλου)는 말도 비슷한 의미인데, 굳이 구별하자면 이것은 질적인 면에서 ‘순수하다’(pure)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외형적인 점에서도 결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면에서도 순수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금과 은’과 같이 유한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댓가로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와같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성도들이라면 ‘헛된 행실’에서 돌이켜야 하고, 인생의 나그네 여정을 살아갈 때 더욱 더 근신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진흙과 먼지로 빚으셨습니다. 재료의 구성 성분으로 보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가치는 이와같은 물질적인 것으로만 환원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값’이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가치는 본래적으로 높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최고로 인정해 주시는 분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최고의 존재로 인정해 주시는 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기 때문에 ‘거룩’을 드러내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1. 인간의 외모가 아니라 내면을 바라보시는 주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게 하소서.
2. 우리를 대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게 하소서.
3. 과거의 헛된 행실에서 벗어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