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2:1~4,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서 2:1~4,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말씀 묵상을 돕는 글】
오늘은 차별과 편견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인류의 역사는 한편으로 ‘차별의 역사’이고, 다른 한편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인종, 성별, 계급, 계층 간의 차별이 점차 극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사가 늘 진보하지 않는 것처럼 차별과 편견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필요한데, 이와같은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는 것은 단지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야고보서 2장 1절을 보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차별이라는 단어는 ‘προσωπολημψίαις’(푸로소폴렘푸시아)로 ‘푸로소폰’과 ‘람바네인’의 합성어입니다. ‘푸로소폰’은 ‘얼굴, 용모’라는 뜻이고, ‘람바네인’은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는 것은 ‘얼굴을 들어올리는 것, 다시 말해서 호의를 갖고 사람을 용납한다’는 뜻으로 그 사람의 부유함이나 신분의 높음 때문에 그 사람을 특별히 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면 4절을 보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차별’이라는 단어는 ‘διεκρίθητε’(디에크리세테)인데, 이것이 ‘discriminated’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고 오히려 내려다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차별에는 두 종류의 차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만을 특별히 우대하는 것도 차별이고, 반대로 어떤 사람을 특별히 낮추는 것도 차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차별하는 것은 믿음을 떠나는 일이고, 악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차별에 대한 신앙적인 견해입니다.
이와같은 차별의 문제는 현대 교회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예가 2절에 나오는데,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라고 말합니다. 고대인들은 가운데 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에 금반지를 끼고, 어떤 손가락에는 두 개 이상의 반지를 끼기도 했습니다. 또 부자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반지를 빌려서 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금 가락지는 부를 상징하고, ‘아름다운 옷’은 신분을 나타내기 때문에 자신을 과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남루한 옷을 입’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더러운, 불결한’ 옷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은 ‘구걸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이 회당에 들어올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냐면, 3절을 보면,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고 말했습니다. 부자가 들어올 때 ‘눈여겨’ 보았다는 말은 ‘올려다 보는 것, 존경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을 향해 ‘서 있든지’라고 말하는 것은 ‘사물이나 물건을 어떤 위치에 놓는 것’, ‘구석에 쳐 박혀 있으라고 명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발등상 아래’에 앉는다는 말은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자가 패자를 발등상 아래에 꿇어 앉게 했던 것을 연상시킵니다.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와같은 차별은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형제, 자매라고 부르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귀천에 따라 지나치게 높이는 차별을 하기도 하고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차별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차별에 대해 야고보는 4절에서 ‘악한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이와같은 차별이 교회 안에서도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비신앙적인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인데, 가난한 사람들은 외면받고 부자들은 대접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아무래도 교회에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생각의 배후에는 교회도 결국 물질적인 힘과 능력에 따라 움직인다는 불신앙적인 생각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교인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 교회의 유명도나 신도들의 사회 경제적 수준 등을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목사의 설교 내용이나 교단의 교리, 집과의 거리 등을 주로 감안해 교회를 선택했던 과거와는 달리 대형교회 신자들 중 상당수는 ‘그 교회’가 [수준 높은 지식인 계층과 중산층들이 다니는 교회]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면 자신도 중산층으로 여겨지게 된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슬픈 일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차별과 편견이 있어도 신앙 공동체에서만큼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오히려 더 심각한 차별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와같은 차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차별이 인간에 대한 존중, 인권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신앙적인 문제가 있는데, 다시 1절을 보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그 사람의 외모로 판단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의미에서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혹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놓고 그 사람의 믿음을 평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같은 점에서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기도 하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도 성공과 실패로 그 사람의 믿음의 정도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경우든지 이것은 온전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1. 혀를 재갈 물리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2.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경건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3.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4. 자기 마음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