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0:1~8,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립니다
시편 130:1~8,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립니다.(팟캐스트 방송 듣기)
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8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말씀 묵상을 돕는 글】
시편 130편은 시편에 나오는 7개의 참회시 가운데 여섯 번째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1절을 보면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죄에 대한 참회로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여기서 ‘깊은 곳’은 바닥을 알 수 없는 바닷 속 깊은 골짜기를 의미합니다. 시편 130편의 시대적 배경을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상황인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인데, 엄청나게 깊은 수렁,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바닷 속에 빠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치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깊은 바다에 빠진 후에 요나서 2장 3절을 보면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라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시인도 엄청난 고통의 파도에 뒤덮여 깊은 곳에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의 공통점이 깊은 고난에 빠진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출애굽기 2장 23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그래서 3장에서 하나님의 응답으로 구원자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또한 사사기 3장 9절에도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고 말씀하고, 사사기 6장 7, 8절에도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셨는데 그 사람이 기드온이었습니다. 모두 깊은 어둠, 깊은 고통, 고된 노동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구원자를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깊은 골짜기에 있다고 해서 저절로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3, 4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설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죄악을 지켜보신다’는 표현이 ‘주시하다, 계속해서 관찰하다’는 뜻인데, 만약 하나님께서 율법의 요구대로 우리를 판단하시고 지켜보고 계신다면 하나님의 의로운 잣대를 통과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인생이 거기서 끝난다면 우리는 비관적인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도리어 ‘사유하심이 주께 있’기에 주님을 경외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당면한 삶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분이 계시기에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실을 깨닫게 되자 시인은 5절을 보면,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란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의 말씀을 바란다’는 말을 직역하면 ‘내가 그의 말씀 안에 소망을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또 6절을 보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라고 고백하는데 여기서도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린다’는 것은 ‘내 영혼이 주께 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의 삶의 소망을 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내 영혼이 나아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기다리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기다리기는 기다리지만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중간에 지쳐 낙심하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다림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다림의 결과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처음에는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이 커지고 결국 회의감에 빠져서 기다림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인은 끝까지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릴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7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8절)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시는 분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임을 믿었기 때문에 끝까지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델리취라는 신학자는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임종하는 순간, 침상 위에서 한 성도가 그의 눈을 뜨고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외쳤던 유언을 인용하면서 ‘나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득하도다. 나의 전 영혼은 지금 하나님께 향하고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면서 기다렸던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오지 않는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바라며 사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다림은 허무한 기다림이 아니라 기다릴만큼 충분한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잠시의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잉태한 산모가 고통을 이겨내고 아이를 출산하는 것처럼 우리도 기다림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과 은혜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