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 묵상을 돕는 글】
재미있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깜짝 놀랄 일이 세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도저히 천국에 올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천국에서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두 번째는 반드시 천국에 갈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천국에서 보이지 않을 때, 마지막 세 번째는 자기가 천국에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국에 가는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겉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의 신앙에 대해 온전히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기준으로는 천국에 올 사람, 혹은 오지 못할 사람인데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결과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 히브리서 4장 1절에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았는데, 안식에 대한 약속이 남아 있는데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출애굽을 했다고 해서 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께서 안식의 약속을 주셨다고 해서 다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좀 심각하게 말하면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깜짝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안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는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2절)하기 때문이고, ‘순종하지 아니’(6절)하기 때문이고, ‘마음을 완고하게’(7절)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야 하는 말씀, 순종해야 하는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그 말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먼저 12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은 말씀의 ‘인격성’을 나타내고, ‘활력이 있다’는 말은 ‘역동성’을 지녀서 행위를 동반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에 불순종한 자들에게는 경고와 심판이 주어지지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약속된 말씀을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는 것은 말씀에 불순종할 때 말씀이 오히려 치명적인 무기로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수기 14장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아말렉과 가나안인들의 ‘검’에 패배하여 도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악을 예리하게 심판하는 검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신다고 말하는데, ‘찔러’는 ‘꿰뚫다’는 의미이고, ‘판단’은 법정적인 용어로 ‘판결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까지 통찰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다’는 앞부분 보다는 뒷부분에 나오는 ‘어떤 검보다 예리하고,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서 쪼개기까지 하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고, 그래서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다 드러나게 된다’는 말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의사가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위해 단층 촬영을 해서 환자의 작은 세포 조직까지 샅샅이 조사하고 검사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 상태를 조사하고 검사하는 것처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비춰 보라는 의미입니다.
본훼퍼라는 신학자는 초기에는 ‘하나님 앞에서 지성의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읽는 사람은 아직도 인간학적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본훼퍼는 처음에는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지성으로 자기 자신이 읽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성경말씀을 이런 식으로 읽고 나서부터는 매일 매일의 나의 삶이 얼마나 경이롭게 펼쳐지는지 너에게 반드시 말해주고 싶’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성으로 자신을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간의 삶을 분해하고 분석하며 바른 길을 깨우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혼과 영을 분석하고,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고, 마음의 생각과 뜻이 무엇인지를 판단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를 죽이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마음, 완고한 마음, 말씀을 들어도 믿음으로 결부되지 않는 연약한 모습을 드러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셔서 고쳐주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씀으로 수술하기 위해서 말씀으로 조명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는 순간, 오히려 말씀이 우리의 삶을 읽고, 우리의 삶에 파고들어서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을 깨우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살아있고 역동적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13절을 보면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말씀만 제대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보다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과 행동으로 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마치 어둠 속에서 사물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속일 수 있고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삶이 결국은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드러난다’는 말은 ‘목을 뒤로 젖힌다’는 뜻입니다. 레슬링 선수가 상대방의 목을 감아서 뒤로 젖히거나 짐승의 목덜미를 젖히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다스리기 때문에 어떤 것도 은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말씀에 순종하며 진실된 마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함께 드리는 기도】
1.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게 하소서.
2. 하나님의 말씀의 검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3.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