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2:22~26,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디모데후서 2:22~26,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말씀 묵상을 돕는 글】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에서 잘못된 이단 사상과 세속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악성 종양과 같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견고한 터 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금 그릇과 같은 성도들로 살기 위해서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22절을 보면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말합니다. ‘청년의 정욕(ἐπιθυμίας)’은 일반적으로 ‘성적인 욕망’을 나타내지만 ‘명예욕이나 성취욕’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하라’(φεῦγε)는 것은 ‘탈출하다, 도망치다’(flee, escape)는 뜻입니다. 그런데 ‘욕망’을 피하라는 것은 자칫 ‘열심, 열정’을 갖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욕망과 열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주체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심과 열정’을 갖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정욕’에 빠지는 것은 정욕에 의해 ‘내가’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욕망과 물질’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욕망으로부터 탈출하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공동체’를 통해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는데, 그렇다고 아무나 함께 신앙 생활을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고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모두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깨끗한 마음’은 ‘불의에서 떠난 사람, 내면의 인격이 정결한 그리스도인’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건강하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네가지를 말하는데, 먼저 ‘의’는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 하는 행동이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지를 돌아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람들에 대한 신의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신앙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깊어질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신의와 신뢰가 깊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이고, ‘화평’은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삶의 모습,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23절을 보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이미 디모데후서 2장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했던 ‘말다툼’(14절), ‘망령되고 헛된 말’(16절), ‘악성 종양’(17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이단들의 허탄한 족보와 신화에 대한 논쟁이 에베소 교회 안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와같은 ‘변론’은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다툼’을 일으키고 잘못된 가르침을 선전하는 효과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24절을 보면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바울은 사도들 중에서 가장 다툼을 많이 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5장 39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갔다고 말합니다. 이 일로 인해 바울은 바나바와의 관계 뿐만 아니라 마가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서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말하면서 비로소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 2장 11절에는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고 말하는데, 바울이 베드로를 일방적으로 책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바울과 베드로가 크게 다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다투지 말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지금 에베소 교회의 상황과 관련해서 거짓 교사들의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서 ‘주의 종’은 일반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교사들이 이단적인 가르침과 직접 다투거나 논쟁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교사들에게 주어진 복음을 사람들에게 잘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5절을 보면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말합니다. ‘거역하는 자’는 잘못된 교리에 빠져 ‘주의 종(교사)’들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이단에 빠진 사람이나 혹은 신앙이 연약하여 쉽게 흔들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온유함으로 훈계’하라고 말하는 것은 훈계의 목표가 이들을 심판하거나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26절에서도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깨어’는 ‘맑은 정신을 회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25절에서 ‘회개’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사람들을 ‘온유함으로 훈계’를 하는 이유는 이들이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금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온유함으로 훈계’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온유함’만 강조되면 ‘훈계’가 사라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잘못된 사상에 빠진 사람들이 방종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훈계’만 강조되면 ‘온유’가 사라져서 돌이킬 수 없는 분쟁과 다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특별한 방법이나 매뉴얼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온유함도 중요하고 훈계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온유한 훈계를 하려면 무엇보다도 훈계의 이유가 이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어야 하고, 또한 이들로 하여금 다시금 신앙의 열심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1. 욕망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2.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추구하며 살게 하소서.
3. 온유함으로 훈계하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