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기독교의 역사 7】 수도원의 역사, 마태복음 10:7~14
【종교개혁과 기독교의 역사 7】 수도원의 역사, 마태복음 10:7~14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말씀 묵상을 돕는 글】
오늘은 수도원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지난 시간에 생각해 본 것처럼 기독교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공인된 종교가 되었습니다. 엄청난 박해와 고난이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환영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때부터 교회는 제도화와 세속화의 길로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급격하게 신앙의 순수성이 약화된다는 점에서 큰 위기가 시작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동안 기독교 공동체가 지니고 있었던 종말론적이고 이상적인 신앙이 퇴색하면서 권력화, 세속화가 가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모습을 보면서 제도 교회 밖에서 기독교적인 삶의 이상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모습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에 광야에서 살았던 삶과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에세네파의 쿰란 공동체와 세례 요한, 심지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셨던 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AD 2~3C경 수도원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금욕과 은둔의 삶을 살기 위해 광야를 떠도는 방랑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모나코스’(혼자 혹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독특한 삶을 사는 사람)라고 불렀고 이것이 후에 ‘수도원’(Monastery)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와같은 사람들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아타나시우스가 쓴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라는 책에서 ‘안토니우스(Antonius)’를 소개하면서 부터인데,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가서 금욕과 고행의 삶을 살면서 오직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악령들의 시험과 유혹을 기도로 이겨내면서 90여년 동안 수도 생활을 하였습니다. 또한 시라아의 사막에서는 주상고행자였던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높은 기둥 위에 올라가서 앉지도 않고 서서 30여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개별적인 수도 생활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한계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같은 극단적인 고행을 하기가 어려웠고 특히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깊어지면 질수록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눌 공동체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점차 공동체적인 수도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가장 먼저 공동체적인 수도원을 시작한 사람은 ‘파코미우스’입니다. 파코미우스는 324년에 수도 헌신자를 모아서 공동 거주, 공동 기도 뿐만 아니라 공동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을 할 수 있도록 하였고, 또한 수도원 공동체의 규범을 만들어서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방교회 수도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실리우스’(Basilius)에 의해 공동체적 수도원은 더욱 신학적으로 체계화 되었는데, 그는 「수도 규칙」을 저술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만드셨으며 공동체적인 수도생활이 개별적인 은둔 금욕 생활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황량한 광야가 아닌 도시에 세우고 사회 구제와 교육에 헌신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이렇게 동방교회에서 시작된 은둔과 금욕의 수도 생활은 점차 서방 교회에도 전해지게 되었는데 서방 교회 수도원은 크게 ‘아일랜드 수도원’과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아일랜드 수도원은 섬의 특성상 교회와 수도원의 차이가 없었고 교회가 곧 수도원이 되는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베네딕트 수도원(529년)을 시작한 베네딕트는 지금까지 수도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규범을 연구하여 [베네딕트 수도 규칙]을 제정하고 수도사들이 ‘청빈, 순결(독신), 순명’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와 명상 외에 육체 노동과 공부를 부과하고 재산을 공유하는 공동생활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와같은 베네딕트 수도원이 이후에 모든 수도원의 기초가 되면서 단순한 수행 기관을 넘어서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수도사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수도원이 중세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세 시대 수도원은 금욕과 경건을 추구하는 종교 기관이 아니라 왕실의 보호 하에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세속적인 기관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도원을 활용하였는데, 이렇게 타락한 수도원을 개혁하기 위해서 910년 경에 클루니(Cluny)수도원이 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클루니 수도원도 시간이 지나면서 광대한 토지와 재산을 소유하면서 점차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토 수도원’이 생겨났는데, 시토 수도원도 베네딕트의 규칙을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힘쓰면서 수도원의 건물과 기구, 장식물들을 가장 단순한 것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특히 시토 수도원은 다시금 노동을 통한 자급자족을 강조하였는데, 이런 과정에서 농부들을 위한 농사법을 개발하여 전파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시토 수도원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클레르보의 성 버나드(St. Ber-nard, 1090~1150)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유럽의 양심’으로 불리면서 나중에 루터와 칼빈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시토 수도원도 나중에는 물질적인 유혹과 성적인 타락에 빠져서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클루니 수도원과 시토 수도원의 실패를 경험한 후에 1200년경부터 수도원을 개혁하려는 시도로 ‘탁발 수도회’(The Mendicant Order)가 시작되었습니다. 탁발수도회는 ‘걸식 수도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들은 절대적인 빈곤 속에서 완전한 무소유를 통해 수도원의 타락을 방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과 영성을 방해하는 요인은 다른 종교나 철학이 아니라 ‘물질의 탐욕’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탁발 수도회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인데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던 프란체스코가 방탕한 시절을 보내다가 앗시시 근처의 샌 다미노(San Damiano)마을의 교회당에서 “하나님의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우라”는 음성을 듣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제자 파송의 말씀(10:7~14)에 따라 예수님의 가난과 겸손을 따르는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절대적인 빈곤과 가난을 강조하였는데, 하지만 프란체스코가 죽은 후에 제자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재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제자들이 승리하면서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정신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비슷한 시기에 ‘도미니크 수도회’가 있었는데, 도미니크(Dominic de Guzman)가 수도회를 시작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교회가 여러 가지로 타락하는 상황에서 영지주의 이원론과 같은 ‘카타리파’라는 이단이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이와같은 잘못된 이단에 맞서서 싸울 수 있기 위해서 철저하게 금욕 생활을 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수도원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들은 ‘설교자들의 수도원’(the Order of Preachers)이라고 불리기도 하였고, 여기에서 중세에 유명한 신학자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탁발수도회 중에서 종교개혁과 관련해서 중요한 수도회가 ‘어거스틴파 수도회’(오스틴 교단)인데, 처음에는 수도회가 아니라 성직자의 무리로 속세를 떠나지 않고 청빈과 복종의 공동생활을 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습니다. 그러다가 1250년 교황 알렉산더 4세가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는데, 앞서 언급한 시토 수도원이 세상과의 엄격한 분리를 통해 베네딕트 수도회를 개혁하려고 시도했다면 어거스틴파 수도회는 세상을 향해 사도적 생활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은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따라 설교와 교육,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노약자를 위한 병원과 구호소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루터도 처음에 이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살면서 선배 수도사였던 요하네스 폰 스타우피츠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거스틴 수도회의 영성적 배경을 바탕으로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개혁교회가 믿음의 선조로 어거스틴을 기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 이후에 수도원은 약화되었는데, 왜냐하면 수도원과 수도원 규칙은 양심의 자유와 복음으로 인해 얻어진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종교 개혁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수사와 수녀들을 결혼하도록 하였습니다. 또 종교 개혁을 지지했던 제후들에 의해 수도원은 폐쇄되거나 압류되는 수난을 겪게 되었고,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는 더욱 철저한 세속화의 과정에서 수도원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으면서 사라져갔습니다. 하지만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전이 초래한 억압과 약탈과 자연 파괴와 물질주의 속에서 인간성 상실을 경험하면서 영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수도원 운동이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가톨릭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수도원이 개신교 내에서도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와 스위스의 ‘라브리 공동체’를 통해 새롭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1. 믿음을 향한 영적인 투쟁을 멈추지 않게 하소서.
2. 물질과 세속의 욕망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3. 세속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