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기독교의 역사 11】 종교개혁의 본격적인 출발-루터와 쯔빙글리, 로마서 1:17, 디모데후서 3:16~17
【종교개혁과 기독교의 역사 11】 종교개혁의 본격적인 출발-루터와 쯔빙글리, 로마서 1:17, 디모데후서 3:16~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말씀 묵상을 돕는 글】
앞서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던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한 두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한명은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루터(1483~1546)이고 다른 한명은 루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쯔빙글리(1484~1531)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기 전에 먼저 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당대에 인문주의자로 유명했던 ‘에라스무스’(1466~1536)입니다. 에라스무스는 가톨릭의 사제였지만 ‘우신예찬’을 통해 부패한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였고, 특히 그리스어를 공부해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어 사본을 수집한 후에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편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병기한 신약성경을 1516년에 출판하였습니다.
이와같은 에라스무스의 연구를 통해 당시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관행이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특히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깨달았던 ‘이신칭의’의 교리는 에라스무스가 그리스어로 번역한 신약성경을 공부하면서 얻어진 결과라는 점에서 에라스무스가 루터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자신이 직접 종교개혁에 참여하지는 않고 그대로 가톨릭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후에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에서 모두 공격을 받으면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종교 개혁과 관련해서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루터의 생애를 돌아보면,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작센 지역 아이스레벤에서 광산업을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루터를 법률가로 출세시키려고 했지만, 어느날 벼락이 떨어지는 사건을 계기로 루터는 1505년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은수자 수도회’에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고행과 금욕을 강조하는 어거스틴 수도회에서 수도사로 살면서 하루하루의 삶을 성화된 삶을 살기 위해 피나는 고행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수한 고행과 고해성사로도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뇌 속에서 시편과 로마서를 연구하던 중에 루터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되었는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롬1;17)는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의는 심판이 아니라 인간을 의롭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은 나의 의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수동적인) 의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더 이상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오게 되었고, 복음은 그야말로 기쁜 소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이와같은 진리를 깨닫는 순간 ‘마치 천국 문이 열리고 내가 거기로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환희를 느끼게 되었는데, 이것을 루터의 ‘탑 방에서의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종교개혁의 핵심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칭의’를 루터는 성경 연구를 통해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즈음에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성베드로 성당을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면죄(벌)부를 발행하여 재정을 충당하려고 하였습니다. 사실 연옥 교리가 확립되기 이전의 면별부는 중세 교회의 사면 제도 또는 시혜를 베푸는 교황의 모호한 특권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죄사함에 대한 교리가 구체화 되었는데, 즉 죄를 사제에게 고해하면 죄가 용서되고, 지옥에서의 영원한 벌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벌은 금식, 순례, 자선 등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데 만약 생전에 해소하지 못하면 지옥에 가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면벌’은 자신이 저질렀던 벌을 경감시켜 주는 수단과 증서였습니다. 그러면서 ‘공로의 보고’라는 교리가 공식화되면서 부터는 면벌부 제도가 확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사도, 성인 및 순교자들이 충분한 분량의 공덕을 하늘의 보물 창고에 쌓아 두었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그것을 베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망한 가족들까지 포함하는 방식으로 인해 면벌부의 본격적인 남용과 부작용이 초래되었고, 면벌부가 예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교황의 베드로 대성당의 개축과 재건을 위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면벌부를 홍보하는 면벌부 설교자까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가 제작한 면벌부 지침서를 접한 후부터 면벌부 비판에 나서게 되었는데, 면벌부 설교자 요한 테첼이 판매고를 높이는 데 주력하는 것이 사실상 대주교의 지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와같은 면벌부가 복음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자신이 교수로 일하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금요 발표일에 면벌부에 대한 토론을 제기하면서 마인츠 대주교에게 보내는 서신에 그 논제를 동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루터의 95개조 논제가 한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유는 1440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발명되면서 인쇄술의 혁명이 일어난 것과 관계가 있는데, 이렇게 인쇄술의 발달로 삽시간에 전 유럽으로 루터의 95개조 의견서가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루터는 매우 중요한 글들을 발표하게 되는데,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고함, 기독교회의 개선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교황에게만 허락된 성서 해석권과 공의회 소집권, 면죄부 발행 등의 문제점과 교황의 부패 그리고 교회의 개혁에 대해 독일 귀족들에게 호소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만인사제설’을 주장하며 성직자와 평신도의 신분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교리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가르침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고 성경을 보급하기 위해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종교개혁도 ‘말씀’으로부터 비롯되었고, ‘말씀’을 통해 지속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루터의 종교개혁은 인간이 세운 전통과 권위도 성서와 신앙의 양심보다 앞설 수 없으며, 칭의론이야말로 교회의 토대임을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칭의론을 오해한 나머지 기독교인의 삶과 윤리가 부차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뒤를 이어서 등장한 ‘칼빈’은 ‘칭의’와 더불어 ‘성화’(Sanctification)을 강조하면서 경건주의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루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스위스에서도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는데, 루터가 수도사로서 종교개혁자가 된 반면 쯔빙글리(Ulrich Zwingli)는 인문주의자로서 종교개혁자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와 공통적으로 쯔빙글리도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에라스무스가 번역한 그리스어와 라틴어 병행 성경을 연구하면서 루터와 똑같이 성경의 본질과 십자가의 정신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면죄부의 폐해와 교황청의 비리를 지적하면서 종교 개혁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츠빙글리는 성경을 통해 죄와 칭의에 관한 어거스틴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점차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와는 멀어지는 대신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에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루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종교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그가 루터와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이유는 성만찬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둘 사이에 있었던 성만찬 논쟁은 종교개혁 시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신학적 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루터의 영향권에 있었던 독일 남서부의 도시들에서 츠빙글리의 주장에 동조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독일 남서부는 루터의 영향 하에 남게 되었지만 스위스의 종교 개혁은 루터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인 개혁교회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츠빙글리의 새로운 개신교회는 루터파가 여전히 로마 가톨릭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던 데 반하여 자신들은 철저하게 완성된 개혁(Reformed)을 이룬 교회라는 자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1.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의 진리를 간직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2.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소서.
3. 성경을 묵상하면서 연구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