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기독교의 역사 10】 종교개혁의 선구자-위클리프와 얀 후스, 고린도전서 11:23~29
【종교개혁과 기독교의 역사 10】 종교개혁의 선구자-위클리프와 얀 후스, 고린도전서 11:23~29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말씀 묵상을 돕는 글】
지난 시간에 우리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종교개혁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이 시대적인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참된 신앙을 고백했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흑사병과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초래된 ‘죽음’의 현실 속에서 교회는 천국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대신 ‘면죄부’를 통해 거짓된 위로를 판매하였습니다. 또한 ‘신대륙의 발견’으로 교회가 모든 학문의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생각이 흔들리게 되었고, 르네상스를 통해 고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선구자들은 한결같이 제도와 조직과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성경’이 중심이 되는 교회가 바른 교회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는 루터보다 150년 전에 종교개혁의 기초석을 놓은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데 1374년 교황이 납세 문제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를 불러들였을 때 사절단으로 따라갔다가 교황의 전횡과 부패를 보고 문제 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컨터베리대학의 학장이었던 위클리프는 영국에서 종교개혁운동을 시작했는데, 진리의 근원은 교황이 아니라 ‘성서’(성경의 진리, 1378)가 최고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성직자가 어떠한 세속적 권위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당대 교회가 깜짝 놀랄만큼 급진적인 비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위클리프가 활동을 할 때는 교황이 여전히 세속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클리프의 주장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위클리프 혼자 외로운 투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결정적인 사건이 1215년에 일어났는데, 위클리프는 가톨릭 교회가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확정한 ‘화체설’을 정면으로 부정했습니다. 그래서 “성례전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성찬을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상징적인 표지일 뿐이며,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임재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말하는 것은 미신을 조장하고 성육신의 원칙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는데, “떡과 포도주가 되는 본질요소인 실체가 없어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모양과 맛, 냄새, 색깔은 그대로 존재하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느냐”고 반박했습니다. 그러면서 성찬에서의 떡과 포도주는 눈으로 보이는 떡과 포도주일뿐 그 이상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와같은 위클리프의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 임재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위클리프는 “만약 사제가 떡을 뗄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을 쪼개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신성모독죄”라고 주장했고 “우리는 이로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영적으로 받는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육체적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먹는 것이다. 그분의 살을 육적으로 먹어야 하고 그분의 피를 육적으로 마셔야 하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지만 이런 화체설에 대한 비판은 당시에는 혁명적인 도전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그를 지지했던 잉글랜드의 권력자와 귀족 계층들이 등을 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1381년 위클리프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는데, 이때부터 위클리프는 1384년에 병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성경 번역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래서 1382년, 위클리프는 완역 영어성경을 내놓았습니다. 위클리프의 영어 성경 번역은 헤레포드의 니콜라우스의 도움이 컸는데, 영어로 번역한 최초의 완역 영어성경은 신약 부분이 1380년에 완성되었고, 신구약 전체는 1382년에 발간됐습니다. 원래 라틴어 불가타역 성경에 기초했던 이 번역 성경은 수정된 라틴어 본문에 기초해 1400경 존 퍼비에 의해 개정됐다. 이렇게 위클리프가 성경을 번역한 이유는 신앙의 유일한 표준은 교황이나 주교가 아니라 성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성도의 생활에서 성경의 절대성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가 위클리프와 위클리프의 사상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사건이 위클리프가 죽은 후에 일어났는데, 위클리프가 죽은 후 30여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1415년 콘스탄틴 공의회에서 위클리프의 사상을 정죄하고 그의 서적을 불태울 뿐만 아니라 위클리프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서 화형식을 거행한 후에 스위프트 강에 뿌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영국의 역사가인 토마스 풀러의 영국 종교개혁의 초석을 놓은 위클리프에 대해 “그들이 위클리프의 뼈를 불살라 시내의 급류에 던져버렸다. 그 던진 뼈의 재 가루는 아본강으로, 아본강은 그것을 세버른강으로, 세버른강은 그것을 좁은 바다로, 좁은 바다는 다시 큰 대양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재가 된 그의 뼈는 이제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기초석을 놓은 또 한명의 선구자는 얀 후스(Jan Hus. 1372?~1415)라는 신학자인데, 현재의 체코인 보헤미아에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렸습니다. 얀 후스는 존 위클리프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성경을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였는데,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400년에 사제로 서품 된 후에 프라하 대학의 신학교수와 총장까지 역임하였습니다.
특히 후스는 1402년에 프라하에 있는 베들레헴교회의 설교자로 임명되었을 때 라틴어가 아닌 체코어로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모국어인 체코어로 사도신경, 십계명을 번역하였고 마침내 성경도 체코어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또한 얀 후스는 성당과 수도원에서만 설교할 수 있게 제한한 교황의 말을 어기고 캠퍼스와 강의실에서도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얀 후스는 교황청과 갈등하고 대립했는데, 1415년 종교재판으로 얀 후스는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면서 후스는 마지막으로 “당신들은 지금 거위(휴스 = 거위) 한 마리를 불태우지만, 한 세기가 지나면 태우지도, 끓이지도 못할 백조(루터)를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얀 후스의 말은 100년 후에 정확하게 이루어졌는데, 마틴 루터가 1517년 독일 비텐베르크성당의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얀 후스의 종교 개혁에서 또하나 중요한 것은 ‘공간’에 대한 새로운 시도인데, 후스는 전통적인 성당 건물처럼 긴 직사각형이 아닌 정사각형에 가까운 건물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후스는 이 공간 안에 대대적인 혁신을 시도했는데, 가장 중요한 혁신은 정사각형의 건물 한 면 가운데 위치한 설교단이었습니다. 직사각형의 성당에는 제단이 앞에서부터 뒤쪽으로 위계적인 질서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맨 뒤에 앉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라틴어로 이루어지는 예배와 성만찬을 멀찍이서 ‘구경’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 채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위계질서가 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대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후스는 성만찬을 하면서 평신도들에게도 빵과 포도주를 준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때까지 가톨릭에서는 평신도들에게 잔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후스는 사람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이종성찬(utraquism)’을 처음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후스주의 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나중에 체코 종교개혁이 체코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던 이유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1.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게 하소서.
2. 주의 성찬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3. 끝까지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