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7일(주일)】 성령강림절 후 열 여섯 번째 주일(출애굽기 14:19~31, 마태복음 18:21~35)

2023917(주일)성령강림절 후 열 여섯 번째 주일

본문
출애굽기
14:19~31, 마태복음 18:21~35

제목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1.

 

출애굽기 14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 유명한 이야기라서 믿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을텐데, 사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을 육지처럼 건넜다는 기적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과 의미는 31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Israel saw the great work that the LORD did against the Egyptians. So the people feared the LORD and believed in the LORD and in his servant Moses.)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신 것은 마술 쇼와 같은 놀라운 장면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일을 통해 하나님과 모세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사건을 통해 기적적으로 이집트를 탈출하였고, 또 출애굽기 1321, 22절에 나오는 것처럼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믿지 못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사실 출애굽기 148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담대히’(boldly) 나갔습니다. 여기서 담대히손을 높이 들다, 거칠 것이 없는 확신에 찬 행동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기 1321절에 나오는 것처럼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By day the LORD went ahead of them in a pillar of cloud to guide them on their way and by night in a pillar of fire to give them light, so that they could travel by day or night.)셨기 때문입니다. 이때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이집트의 군대가 추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자 출애굽기 1410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When the Israelites saw the king coming with his army, they were frightened and begged the LORD for help.)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자 11절을 보면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They also complained to Moses, "Wasn't there enough room in Egypt to bury us? Is that why you brought us out here to die in the desert? Why did you bring us out of Egypt anyway?)라고 말하였습니다.

 

심지어는 12절을 보면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While we were there, didn't we tell you to leave us alone? We had rather be slaves in Egypt than die in this desert!")고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모세에 대한 원망과 불평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를 받아서 도착한 곳이 2,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near Pi Hahiroth, between Migdol and the sea.)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3절을 보면 파라오가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hemmed in by the desert) 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멀리 떠났다는 말은 거리가 멀다는 의미가 아니라 “wandering around”(혼란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에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의 인도를 받은 결과 막상 도착한 곳이 이런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란에 빠졌고, 결국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이와같은 원망의 말을 쏟아 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애를 썼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를 얻게 될 때 우리는 당혹스러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에 대한 회의감이 들고 원망과 불평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막다른 곳으로 내몰아 가신 것일까요?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하신 이유를 크게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출애굽기 144절에 있는 것처럼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And I will harden Pharaoh's heart, and he will pursue them. But I will gain glory for myself through Pharaoh and all his army, and the Egyptians will know that I am the LORD.")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18절에도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The Egyptians will know for sure that I am the LOR)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 이집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하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25절을 보면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He clogged their chariot wheels so that they turned with difficulty. The Egyptians said, "Let us flee from the Israelites, for the LORD is fighting for them against Egypt.)라고 말합니다.

 

이집트 군인들이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에는 홍해 바다로 막혀있고 이집트의 군대의 추격을 받아서 포위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싸우신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이 장면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통쾌한지 모릅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집트를 도망친 노예들이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엄청난 능력의 하나님께서 이들을 지키고 보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막다른 골목에서 이집트의 군대를 기다리고 계셨고, 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고 해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세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불평과 원망을 쏟아 낼 때,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Don't be afraid! Be brave, and you will see the LORD save you today. These Egyptians will never bother you again.)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혹시 막다른 골목에 있다고 생각된다고 해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는지를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3.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이집트 사람들이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도록 하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게 더 중요한 목적인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확실한 증거와 표징이었습니다. 특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라는 말씀은 바로 한 걸음 앞에서’, 코 앞에서인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처음에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 소풍을 가는 아이들처럼 신바람나게 따라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 편 바닷가’(camp across from Pi-Hahiroth near Baal-Zephon, between Migdol and the Red Se)에 이르게 되었을 때 갑자기 상황이 돌변했습니다. 왜냐하면 7절을 보면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He commanded his officers in charge of his six hundred best chariots and all his other chariots to start after the Israelites.)고 말하고 9절을 보면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the king's horses and chariots and soldiers caught up with them)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앞까지 추격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10~12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고,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겠다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직 하나님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진정한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따라온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유익을 주는 ’(우상과 다를 바 없는)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까지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자기들에게 유리하고 유익했기 때문이었는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록 몸은 이집트로부터 탈출했지만, 아직 마음은 온전히 출애굽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이집트에서 살던 웅상 숭배와 삶의 태도를 벗어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이집트의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믿는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구원해 주셨지만 이들은 다시금 이집트인들의 노예가 되려고 했습니다. 노예 근성, 죄의 속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다른 궁지로 이끄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아 있는 이집트의 잔재(노예근성, 죄의 근성)를 완전히 물 속에 수장시키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다른 길로 이끄셔서 이들의 믿음을 강하게 연단 시키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2, 13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Dear friends, don't be surprised or shocked that you are going through testing that is like walking through fire. Be glad for the chance to suffer as Christ suffered. It will prepare you for even greater happiness when he makes his glorious return.)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들의 인생 여정에는 늘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아간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우리가 겪었던 코로나 팬데믹이 좋은 예입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이와같은 시간을 겪게 하신 이유를 조금은 알거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으셨던 이유는 우리의 믿음을 흔들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리를 찾도록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31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Israel saw the great work that the LORD did against the Egyptians. So the people feared the LORD and believed in the LORD and in his servant Moses.)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심부름꾼이었던 모세가 하는 말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면서 믿음을 회복하게 되었고, 또 이집트 사람들도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오늘날에는 어떤 사건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또다시 홍해 바다를 건너는 사건이 일어나야만 하는 것일까요? 현대판 홍해 바다의 기적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821절을 보면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Then Peter came to Jesus and asked, "Lord, how many times shall I forgive my brother when he sins against me? Up to seven times?")라고 질문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의 종교적 책무를 수치화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범죄 한 이웃을 3번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용서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기 딴에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으로 일곱번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칭찬은커녕 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1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여기서 1달란트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하루 품삯으로 받는 돈이 1데나리온인데 1달란트는 6천데나리온이니까 지금 돈으로 약 6만불 정도, 그러니까 1만 달란트는 상상할 수 없이 큰 액수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사가인 요세푸스의 말에 의하면 유대 전체에서 거두어 들인 1년치 세금이 800달란트 정도였으니니까 1만 달란트는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빚을 임금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던 이 사람은 고작 10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에게 28절을 보면,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였고, 그것도 부족해서 30절을 보면,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 이 사람은 정말 염치가 없고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1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것과 100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1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조건 중에 100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야 한다는 조항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4절을 보면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가 천국에 관한 비유’(23)이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서 세상의 법으로는 1만달란트를 탕감받았어도 100데나리온을 탕감하는 것이 별개지만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큰 용서를 받은 자가 작은 것을 용서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와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받은 용서가 1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것과 같고, 우리가 일곱을 일흔번까지 용서하는 것은 100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490번을 용서하더라도 우리가 받은 용서에 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용서하지 못합니다. 한번, 두 번 용서를 한 후에는 용서를 포기하거나 중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사랑과 용서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천국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설령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은 자연현상의 일부라고 생각할 뿐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에게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분명한 기적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의 기적, 사랑의 기적입니다.

 

사실 이런 설교가 저에게는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용서하기 어려운 일들을 만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일곱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기적,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큰 기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기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의 죽음을 상상할 수 없지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오지 않고 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짜 기적은 이런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기적은 성공 신화가 아니라 이와같은 사랑의 기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와같은 사랑과 용서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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