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5일(주일)】 성령강림절 후 스무번째 주일(출애굽기 32:1~14, 시편 23:1~6)
【2023년 10월 15일(주일)】 성령강림절 후 스무번째 주일
【본문】 출애굽기 32:1~14, 시편 23:1~6
【제목】 욕망(greed)의 신앙 vs 신앙의 욕망(craving, desire)
출애굽기 24장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The LORD said to Moses, Come up to me on the mountain and stay here, and I will give you the tablets of stone, with the law and commands I have written for their instruction.)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산에서 ‘사십일 사십야’(forty days and forty nights)를 머물면서 성막과 제사장 직무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게 출애굽기 25장부터 31장까지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2장 1절을 보면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When the people saw that Moses delayed to come down from the mountain)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더디다’(בֹשֵׁ֥שׁ)는 영어로 ‘delayed’라고 번역했지만 사실은 ‘to be ashamed’, ‘부끄러워하다, 실망하다, 당황하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에 시내산에 도착할 때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와 보호를 경험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월절 사건을 통해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하셨고, 홍해 바다가 가로막혀 있을 때는 바다가 갈라져서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 주셨고, 마실 물이 없을 때는 반석을 치자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도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승리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전혀 실패와 패배를 경험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시내산에서 모세가 내려오지 않으니까 크게 ‘당황하고, 실망’하게 되었고,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큰 혼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절 하반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Come, make gods for us, who shall go before us)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했던 내용이 “make gods for us”인데, 공교롭게도 지난 주일 찬양예배 주제가 “God for us”였습니다.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사실 완전히 의미가 다른데, 왜냐하면 “God for us”는 타락한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의 말씀을 주셨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구원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했던 “make gods for us”는 자신들이 느끼고 있는 공허함과 불안감, 부끄러움, 실망감을 대신 채워줄 무엇인가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래서 4절을 보면 ‘송아지 형상’(an image of a calf)을 만들었는데, 고대 근동에서 황소는 ‘주권, 지도력, 힘, 풍요’를 상징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더 강해지고, 더 풍요롭게 되고, 더 힘을 가질 수 있기 위한 수단으로 ‘신’(gods)을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욕망의 신앙,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신앙”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욕망의 신앙”은 “욕망”을 추구하고 “욕망”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성적인 타락과 같은 또다른 “욕망”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데, 6절을 보면,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They rose early the next day,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brought sacrifices of well-being; and the people sat down to eat and drink, and rose up to revel.)고 말합니다.
여기서 ‘뛰놀다’(revel)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가 창세기 26장 8절에서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껴안다”(Isaac was caressing his wife)는 단어이고, 창세기 39장 14절에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고발하면서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in a Hebrew to us to make sport of us; he came)라고 말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뛰놀다’는 말은 ‘성적인 행위’를 암시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가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성적인 광란’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모습은 이방인들의 제사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의 예배는 철저하게 욕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 즉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있었는데, 이방인들처럼 “욕망의 신앙, 욕망을 추구하는 신앙”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목표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2.
말씀을 묵상하면서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욕망”의 신화에 빠져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우상에 빠질 수 있었다면 우리도 충분히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론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론만큼은 백성들을 바르게 가르치고 인도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론이 앞장서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왜 그랬던 것일까요?
굳이 아론을 위해 변명한다면 아론이 처음부터 우상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론이 만들려고 했던 것은 이방인들처럼 황소의 우상이 아니라 흔히 고대 근동에서 ‘신’의 발 받침대로 황소 형상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론이 황소 신을 섬기기 위해서 황소 우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모세가 없는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줄 수 있는 발 받침대를 송아지 형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론의 행동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황소의 형상이든 아니면 하나님의 발 받침대였든 중요한 것은 이와같은 형상을 만든 이유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 특히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시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론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하려고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고 해도 근본적인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려도 이미 순수성을 잃어버린 예배가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뛰놀았다’는 단어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이방인들의 제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성적인 퇴폐와 문란한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 중에도 그대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욕망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처럼 보여도 욕망의 신앙은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에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섬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욕망의 신앙은 인간을 더욱더 타락으로 인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신앙이 “하나님 중심”의 신앙일까요?
3.
시편 23편을 보면 유명한 다윗의 시가 나오는데, 여기서 다윗은 ‘욕망의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욕망’을 추구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지녔던 ‘신앙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요?
흔히 시편 23편은 다윗이 최고의 전성기 때에 쓴 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시에 나오는 표현들을 보면 부족함이 없고, 쉴 수 있는 물가에서 편안히 쉬고, 상을 베푸시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잔이 넘치는 풍성함을 언급하고 있어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상황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쓰여진 시로 알려져 있는데, 왜냐하면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겨 다닐 때 쓴 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엄청난 고난과 고통의 순간에도 자신을 위한 욕망 대신 오직 ‘하나님’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은총으로 충분하고 완전하다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2절을 보면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He makes me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s me beside quiet waters,)라고 말합니다. 마치 다윗이 호숫가에 있는 아름다운 별장에서 편안하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울면서 도망치고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와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신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아론이 백성들과 함께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신앙적인 구심점을 만들려고 했던 것처럼, 아니면 세속적인 삶에서 돈을 움켜 쥐려고 하거나 사람이나 권력의 줄을 붙잡으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고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대신할 대용물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간절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4절을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Even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your rod and your staff, they comfort me.)라고 말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shadow, 그림자를 뜻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자는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림자가 있다는 말은 그 반대편에 빛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림자는 빛의 반대편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빛을 보지 못하고 반대편에 있는 그림자만을 보기 때문에 두려움에 빠지고, 두려움을 피하려고 송아지 형상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순간에도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목자이시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실 것을 믿기에 주님만 있으면 자신은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다윗이 너무나 부럽습니다. 저도 이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사람이 ‘신앙의 욕망’을 추구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욕망보다는 욕망의 신앙을 추구하고, 욕망의 신앙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신앙의 욕망’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도 신앙의 욕망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른 사람이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요?
4.
출애굽기 32장을 다시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서 춤추고 놀았습니다. 아직 산에 머물고 있던 모세는 전혀 내용을 알지 못했다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The LORD said to Moses, "Go down at once! Your people, whom you brought up out of the land of Egypt, have acted perversely)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게 진노하셨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네 백성’(Your people)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너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여기에 대해 11절을 보면,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But Moses implored the LORD his God, and said, "O LORD, why does your wrath burn hot against your people, whom you brought out of the land of Egypt with great power and with a mighty hand?)라고 응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백성’(Your people)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모세는 ‘주의 백성’(your people)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시겠다는 계획을 철회하시도록 세가지 이유를 말하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셨기 때문(11절)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12절),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13절)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를 듣고 14절을 보면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And the LORD changed his mind about the disaster that he planned to bring on his people.)셨습니다.
이와같은 모세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인데, 사실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보다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종교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짓밟으려고 하는 것은 모두 욕망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처럼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을 위해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 욕망을 성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가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욕망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먼저 그런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욕망을 추구하려는 유혹들을(돌을 떡으로 만들고, 천하를 얻기 위해 마귀에게 절하고, 놀라운 기적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유혹들) 이겨내시고 오히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함을 누리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욕망을 추구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오직 하나님’, ‘오직 십자가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3장 17절, 18절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Fig trees may no longer bloom, or vineyards produce grapes; olive trees may be fruitless, and harvest time a failure; sheep pens may be empty, and cattle stalls vacant-but I will still celebrate because the LORD God saves me.)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불러야 하는 노래가 이와같은 노래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라는 고백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모든 사람들이 ‘욕망의 시대, 욕망을 꿈꾸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만큼은 거룩한 신앙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