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5:19~20,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5:19~20,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말씀 묵상을 돕는 글】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권면을 하고 있는데, 앞서 16~18절에서는 주로 긍정적인 권면을 하였다면 19, 20절에는 부정적인 명령으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19절을 보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소멸’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현인데, 왜냐하면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마치 하나님이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존재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멸된다’(σβέννυτε)는 것은 ‘불을 끈다, 소화시킨다’(extinguish, do quench)는 뜻입니다. 왜 이런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냐면 성경에서 흔히 성령님을 ‘불’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3장 11절을 보면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또 누가복음 12장 49절에도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말할 때도 성령님을 ‘불’로 비유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사라지거나 소멸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고의적으로 거절하거나 방해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4장 30절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은 성령님을 보다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2장 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소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성령을 훼방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죄이기 때문에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어쨌든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가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성령을 소멸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대표적인 예를 고린도 교회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고린도전서 12~14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와같은 가르침을 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고린도 교회 내에서 성령의 은사를 무분별하고 무절제하게 남용하는 광신적인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질서있게 사용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한하거나 배격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는 거꾸로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3장 16, 17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지켜내지 못하면 성령의 불이 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을 모독하는 것들이 모두 성령의 불을 끄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허락하신 성령의 은사를 땅에 묻어 버리거나 혹은 교만과 시기와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정욕, 그리고 감사와 사랑이 사라진 삶으로 성령의 불이 꺼지게 하는 모든 행동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언’은 구약의 말씀과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가르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멸시한다’는 것은 ‘무시하고, 가벼이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마십시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예언을 멸시’하게 된 것일까요? 고린도전서 14장 5절에서 바울은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방언보다 예언의 은사를 우선시 하라고 말했던 이유는 예언의 은사에 비해 방언의 은사가 훨씬 더 신비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언의 은사는 시시하게 생각했지만 방언의 은사에는 열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도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도 고린도 교회와 비슷한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언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무시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의 상황과는 다르지만 현대에도 ‘예언을 멸시’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방송과 인터넷의 발달로 ‘설교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말씀이 존중을 받기 보다는 멸시’를 받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의 은혜와 도전을 경험하기 보다는 오히려 설교를 편식하거나 설교자를 평가하는 도구로 ‘설교’가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말씀’에 순종하는 능력과 의지는 점점 희미해지게 되었고, 사사시대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았던 사람들처럼 ‘말씀에 대한’ 정보는 많아졌지만 정작 ‘말씀의 육화’는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점점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도 바울의 권면은 꼭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 함께 묵상한 19절과 20절은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꺼지는 이유가 말씀을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고, 말씀을 가벼이 여기기 때문에 성령의 불이 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도록 하려면 무엇보다도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1. 나의 삶에서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소서.
2.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3.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게 하소서.